경비업법 엄격 적용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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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623회 작성일 21-02-04 14:45본문
갑질 방지와 해고 위험 사이…‘경비업법 엄격 적용’ 딜레마
경비노동자 인력을 줄이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서울 강북구 SK북한산시티아파트 주민들이 5년 전에 이어 또 한 번 감축을 막았다. 지난 2020년 11월 10일 밤 열린 입주자대표 임시회의에서 나온 결과다. 현행 87명을 유지하되 “추후 사유가 생길 경우 변경할 수 있다”는 특약을 넣었다. 참석자 25명 중 19명이 찬성했다.
경비노동자 감축 논의 배경에는 ‘경비원은 경비 업무만 해야 한다’는 경비업법 조항이 있었다.
입주자대표 측은 경비원이 경비 외 업무를 하지 못한다면 동마다 있는 경비원을 2~3개 동에 한 명으로 줄여 관리비를 절감하고 순찰 기능을 강화하자는 논리를 내세웠다.
경비업법을 둘러싼 딜레마가 현실로 드러난 셈이다. 회의를 참관한 한 입주민은 통화에서 “급한 불은 껐지만 남아 있는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경비일 외 불법’이 부른 딜레마
서울시 공동주택통합정보마당에 공개된 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과 3월 아파트 관리소는 87명 체제로 경비용역업자 선정 입찰 공고를 냈다가 취소했다. 지난 4월부터 새 경비운영시스템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6일 입주자대표 회의에서 경비원 33명으로 경비용역업체 입찰을 진행하기로 의결했다. 입주자대표 측은 감축안을 의결하며 앞으로 경비원이 경비 외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전날 회의에서도 “올해 말 경찰청의 경비업법 계도기간이 끝난 뒤에도 경비업법 예외 적용 등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인원 조정 등을 다시 논의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경비업법상 아파트 경비원은 은행·사무용 건물 시설경비원과 동일한 업무를 하도록 돼 있다. 경비 외 업무를 지시하는 건 불법이다. 경찰청은 법원 판결에 따라 지난해 아파트 위탁관리 회사에 경비업법 준수 요청 공문을 보냈다.
문제는 경비노동자들이 암묵적으로 잡무를 주업무처럼 해왔다는 점이다. 지난해 11월 ‘전국 아파트 경비노동자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전국 15개 지역 경비노동자 338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분리수거·청소·조경 등 경비 외 업무 비중의 합이 45%에 달했다.
분리수거 등 경비 외 업무를 하다 주민들에게 ‘갑질’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 경비노동자는 “‘재활용품을 수거해 쓸 만한 물건을 따로 분리해도 어떤 입주민이 분리수거하지 않고 모아다 파는 것이냐’는 민원을 제기했다”고 증언했다. 정부는 주민 갑질을 방지하기 위해 경비 외 업무를 금지하려 하지만, 경비노동자들은 이를 빌미로 해고 위험이 높아질 것을 우려한다. 국토교통부와 경찰청이 지난 3월 경비업법 사전 계도기간을 올해 5월31일에서 12월31일로 연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조진 서울노동권익센터 기획전문위원은 통화에서 “방범 업무와 관리 업무를 구분해 경비원과 관리원으로 이원화해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입주자대표회의나 입주민 등 실질적 사용자들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적용 대상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원준 한국경비원협회 서울협회장은 “경비인력을 줄여야 한다면 줄인 만큼의 인력을 환경관리원 등 이름으로 주차·미화 등을 담당하게 하면 된다”며 “역할을 분담하면 업무 효율도 상승할 것”이라고 했다.
■불안한 노동환경
지난 2월 기존 용역업체와 아파트 간 계약이 만료된 이후 SK북한산시티아파트 경비노동자들은 이달까지 한 달 단위로 관리사무소와 직접고용을 맺어왔다. ‘1개월’ 초단기계약은 그 자체로 경비노동자들의 불안한 노동환경을 의미했다.
11일 이 아파트에서 만난 경비노동자 ㄱ씨는 “한 달씩 근로계약서를 쓰고 있는데, 인원 감축 이야기가 나와 더 불안했다”며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는 잘릴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라고 말했다. ㄴ씨도 “조금이라도 트집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입사 1년이 안 돼 계약 대상이 바뀐 노동자들은 퇴직금에 불이익이 발생한다. ㄷ씨는 지난해 6월 말 용역업체를 통해 이 아파트에 취직해 이달 말로 아파트에서 1년간 근속한 셈이지만, 1개월 초단기계약 때문에 계약서상으론 1년이 되지 않는다. 그는 “1년 근속했는데도 퇴직금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임시회의 결과대로 새 용역업체에서 기존 87명을 그대로 고용한다 해도, 올해 말 이후 고용 승계가 이뤄질지 미지수다.
탁지영·이창준 기자 g0g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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